Story/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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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Story/Long 2019. 10. 20. 02:37
며칠 전에 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내 앞에는 3~4살로 보이는 귀여운 꼬마 남자애가 있었다. 내려가던 도중 남자애는 지하철이 온다며 엄마 손을 잡고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황급히 밖을 쳐다봤지만 기차는 코 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애기가 장난쳤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그렇게 천천히 쉬엄쉬엄 내려가던 중 어느 순간부터 기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애기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키가 큰 나보다 훨씬 먼 곳을 볼 수 있었고 그 결과 들어오던 기차 또한 볼 수 있던 것이다. 맞아. 키가 크면 보지 못하는 것. 높은 위치에 있으면 절대 볼 수 없는 것. 때로는 낮은 것이 높은 것보다 값진 경우가 있는 법. 아니 애초에 높고 낮음은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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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Story/Long 2019. 10. 18. 21:16
술을 거하게 마셨다. 새벽까지 이런저런 만담을 나누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동이 틀 무렵이다. 다들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택시를 타고 어찌어찌 집으로 갔지만 나는 택시비 5천원이 아까워 강북에서부터 강남 저 밑에까지 술에 쩔은 몸을 이끌고 아직 등을 켜지도 않은 버스 한 구석에 몸을 던진다. 내 인생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스락하다. 마치 지금 기대고 있는 창문처럼 고요하고 차갑다. 사실 생각해보면 정말 별 거 아닌데. 버스도 돈 3천원인데.. . 삶의 비참함을 외면하는 학문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내가 공부하는 학문 이게 실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나 인류의 발전엔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순 있겠지 하지만 이게 삶의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는 자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의 삶을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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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Story/Long 2019. 10. 17. 00:24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도 내 가슴에 큰 멍울을 만든 것은 언제였을까.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래전의 일임은 확실하다. 며칠간 속이 타다 남은 목탄처럼 쓰라렸다. 가슴속에 말 그대로 돌이 얹혀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어떻게 살 만했다. 정말 이기적이지만 내 일이 아니였기에. 나는 셀럽이 아니였기에. 그러던 중 오늘 그녀가 나와 얼마 차이 안나는 26살 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저기 성 안, 그들만의 비보가 아닌 내 주변의, 내 또래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이 정말 연예인의 죽음인가.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경중의 차이는 있겠다만 보통의 사람이 견디기엔 너무나도 가혹했던 것임은 분명하다. 남녀차별, 갈등 같은 그런 진부한 문제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로서 산다는 괴로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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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tory/Long 2019. 9. 17. 22:56
왜 정의는 진짜 가난을 외면할까? 두본이 아빠의 일상주반사 www.usjournal.kr 정말 정말 좋은 글.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혹여나 놓친 부분이 있을까 봐. 기사의 모든 활자 하나하나를, 이 논설을 쓴 기자님의 생각을 온전히 소화해내고 싶었다. . 본문에 쓰여진 대로 왜 정의로운 사람들마저 이제는 진짜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할까. 왜 먹고살만해진 착한 사람들은 애초에 자신들의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줬던 절실한 가난한 사람들을 챙기지 않을까. 전 국민 아동수당이 도입됐지만 부양의무제는 폐지시키지 못했다. 여전히 진짜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런 현실을 반영한 선별적 복지는 전무하다. 해외여행을 밥 먹듯이 다니는 청년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본소득을 주는 정책실험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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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Story/Long 2019. 9. 13. 00:31
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다가 아침 해가 뜰 때쯤 집에 들어온다. 남들보다 늦게 문을 닫는 나의 하루에 무엇을 바라겠냐만은 삶에 반쯤 지쳐 약간의 기대와 함께 현관문을 열면 밤새 식어버린 차가운 공기와 센서등 하나만이 나를 반길 뿐이다. 그래도 이거라도 나를 반겨주는 것이 어디냐. 적막이 흐르고 이런저런 생각에 자기 전에 캔맥주 하나를 딴다. 어느 순간부터 내 인생에는 주황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즈음의 나는 넘어지기 직전의 팽이 같다. 나는 멈춰야 할까 계속해서 가야 할까. 차라리 빨간불이었으면 멈추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의 삶엔 내가 없다. 지금 하는 공부, 지금 하는 일, 지금 내가 지고 가야 할 책임. 모두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실점에 도달한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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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ory/Long 2019. 9. 12. 23:34
오늘 취업한 동기가 학교로 찾아와 간만에 즐거운 만담을 나누던 중의 일이었다. 한 친구가 자기 여자친구가 간절히 바라던 회사에 떨어져 너무 슬퍼한다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회사에 다니고 있던 동기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기 회사에서도 전전이나 기계 또는 신소재가 아닌 다른 전공은 본 적이 없다고. 애초에 들어가기가 워낙 힘든 거니까 너무 상심 말라고. 충격이었다. 그다음 말들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회사에 이공계 밖에 없다니. 지금의 삶이 끝없이 연장된다니. 이렇게 힘든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이 저 회사 아니 저 분야로 가게 된다면 평생 반복된다니. 회사 가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순진한 착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미래의 내가 그려졌다. 어떻게 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