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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개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도시 빈민들
    Dream/교양과목 2020. 9. 13. 00:44

     

    (본 글은 저의 글이니 퍼가실 땐 꼭 출처를 남겨주세요!! ㅎㅎ)

     

    1. 서론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가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전원 백수로 살길이 막막하여 마치 사회에서 기생충처럼 살아가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네 가족이 우연찮은 기회를 통해 장남 기우가 고액 과외 자리를 얻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 [기생충]은 지난달 25일 폐막한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여 개봉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으며 개봉 후에도 평단의 극찬과 대중들의 호평을 받으며 개봉 11일째 7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왜 한국인들은 이 영화에 열광할까. [기생충]은 어떤 영화였길래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거장들을 제치고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유는 영화 속에 있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기택이네 반지하 집은 피라미드형 사회적 계층의 맨 아래에 있으며 기우가 고액 과외를 하러 가는 박 사장네 집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하고 집 안에 마당이 있으며 고지대에 위치해 집 밖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수많은 계단(=계층)을 밟고 올라간 끝에 그 정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박 사장의 집은 피라미드형 사회적 계층 최상층부 사람들의 삶을 매우 효과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영화는 기택네 가족과 박 사장네 가족을 통해 빈부격차와 한국 사회의 기형적인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것도 아주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말이다. 필자도 이 영화를 봤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서 계속 들었던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이것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진짜로 어딘가에는 이런 삶과 일들이 벌어질 것 같은 불쾌함.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영화 속 ‘바퀴벌레’처럼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평생 올라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 계층 이동은 오직 머릿속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자명한 예지몽. 그것들이 내가 느꼈던 불쾌감의 원천이었다. 한국은 지난 70년 동안 다른 선진국들은 몇백 년에 걸쳐 해왔던 경제발전을 급격하게 이루어 냈다. 그 결과 전후 폐허만 남아있던 땅에서 2017년 한국 국내총생산(GDP)이 1조5308억 달러를 기록, 전 세계 12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경제발전 속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도시의 구석으로 쫓겨나듯 정착한 이들이 있었다. 이번 리포트는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도시 빈민들의 역사에 관해 서술하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런 도시 빈민들의 문제가 다루어져 왔던 방식과 쟁점, 현안들을 알아보고 실제로 도시 빈민촌 중 하나인 [구룡마을] 답사기를 통해 도시 빈민과 그들의 삶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영화 속 바퀴벌레처럼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평생 올라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
    계층 이동은 오직 머릿속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자명한 예지몽
    그것들이 내가 느꼈던 불쾌감의 원천이었다

     

    2. 본론

     

    1) 도시 빈민의 역사적 형성

     

    자본주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순수성에 주목한다. 끊임없는 욕망의 재생산은 자본주의의 동력이고 개발과 성장이 최고라는 하나의 신념을 만들어낸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로 가득한 대도시는 그런 하나의 신념에 충실한 결과물이다. 그러한 신념으로 채워진 휘황찬란한 대도시의 빌딩 숲이 높아질수록 그것의 그림자도 더욱 커지고 짙어진다. 그렇게 짙어져 가는 도시의 그림자 속에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양한 빈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도시 빈민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생겨난 사람들이다. ‘도시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공식적인 고용-피고용의 노동시장이나 법, 제도와 사회안전망에 포함되지 못한 삶의 다양한 형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60년대 이래 괄목할만한 속도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이 산업화와 도시화에 필요한 노동력의 공급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촌향도한 사람들에 의해서 충당되어 왔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이촌향도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노동인구의 도시집중은 심화되어 1986년말 서울시 인구는 거의 일천만 명에 육박하여 전 인구의 1/4에 해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도시는 이렇게 급속하게 증가하는 인구를 포용할만한 공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이들의 경제적 기반을 지원할만한 제도 또한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 주택난과 취업난은 심각한 수준에 있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도시의 확대는 광범위한 저소득층 더 나아가서 도시빈민층의 생성을 가속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도시빈민층이 반드시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도시화 수준이 낮은 전통사회에서도 도시 빈민은 존재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도시로 인구가 급속히 집중되면서, 도시 빈곤은 점점 중요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영세 빈농의 일부가 도시로 흘러들어 형성한 ‘토막민’은 근대적 도시 빈민의 시초로 평가된다. 그 뒤 식민지 해방을 계기로 대거 귀국한 해외 이주 한인과 한국전쟁 전후로 국토의 분단이 낳은 월남인 또는 전쟁피난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도시로 몰리면서 1950년대에 도시 빈곤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국민 대다수가 빈곤했고 도시 빈민들도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빈곤의 상황에 부닥쳤다는 점에서 당시의 도시 빈곤은 ‘보편적 빈곤’이자 ‘일과성 빈곤’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1940~1950년대 말에 서울 등의 대도시에 몰려든 도시 빈민들은 도시 하천이나 언덕에 대규모의 판자촌을 이루었다. 이 당시의 도시 빈민은 도시화나 산업화의 결과라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정치, 군사, 사회적 조건과 연관된 것이었다.

     

    휘황찬란한 대도시의 빌딩 숲이 높아질수록 그것의 그림자도 더욱 커지고 짙어진다.
    그렇게 짙어져 가는 도시의 그림자 속에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양한 빈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한국은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 노동집약적 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한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뒷받침하려면 저임금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이러한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농산물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지속하며 농촌인구의 이농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으로 급격한 이농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한 이농민이 대거 도시로 유입하면서 도시 빈민의 규모와 지역이 점점 확대되어 졌다. 이 당시의 이농은 주로 영세 노농들이 가족 단위로 도시로 이주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학력도 낮고 기술도 없는 대다수의 중장년층 이농민 가구는 근대적인 산업부문에 취업하지 못한 채 영세상업이나 행상, 노점상, 일용노동 등의 ‘비공식 부문’에 취업했어야 했다. 이러한 이농 인구의 도시유입은 산업노동력을 상대적으로 과잉 시켜 도시 빈민과 하층 노동자를 구조적으로 생산해냈다. 하지만 지속적인 고도성장으로 인해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고용기회도 늘어나게 되면서 절대적 빈곤의 문제는 완화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농촌인구의 절대적 감소로 인해 이농 인구가 줄고 그 형태도 이전의 가족 단위의 이주에서 청년층의 단신 이농으로 양상이 변화하였다.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의 자동화·합리화 등으로 도시의 노동력이 교체되고 여기서 실직하는 하위노동자층이 늘어나게 되면서 도시 빈민은 점차 젊은 이농민과 도시 내 빈곤 가구의 자녀들로 충원되는 새로운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도시 빈민이 더이상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도시 내에서 빈곤이 세대 간 계승 형태를 띠고 구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고도성장으로 인해 극빈층의 비율이 줄어들고 식량 공급까지 힘든 절대적 빈곤층의 문제는 크게 완화되었지만,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 중산층 위주의 사회정책 등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도시 빈민들의 상대적 빈곤의 문제는 거의 개선되지 못했다.

     

    2) 최근의 도시 빈민의 형태

     

    <“도시 가구 빈부격차 갈수록 증가”, YTN, 2014.06.10.>

     

    그러나 1998년의 IMF 그리고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소득이 감소된 가구가 늘면서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의 계층 하강 이동이 증가하는 한편 도시 빈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이들을 보호해줄 사회적 안전망마저 제구실을 못 하는 까닭에 도시 빈민들은 가족해체, 자살 및 범죄 충동 등과 같은 반사회적 양상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된 이후에도 한국과 세계의 경제 상황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겪고 있으며 향후 1960~1980년대의 고도성장과 같은 상황이 재현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절대 빈곤층의 적체, 상대적 빈곤감의 확산, 빈부격차의 실질적인 증가, 빈곤 문화의 정착 등과 같은 도시 빈곤 문제가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2010년 인구통계에 따르면 국내에 무허가 판자촌과 비닐하우스 등에 거주하는 인구는 1만6880가구(3만8000명) 정도이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인 1만 가구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저학력, 저소득층에 고령화의 문제를 안고 있다. 국내 판자촌 거주자의 평균연령은 65.78세로 각종 주거 형태 중에 가장 높은 수치이며 노인들이기 때문에 혼자라는 외로움과 고독감이 심하여 갑작스러운 응급상황 발생 시 대처가 어려운 상태이다. 현재 도시 빈민촌, 즉 판자촌 거주자의 학력 중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수는 무려 73%이며 무직자는 80%에 달한다. 이 또한 판자촌 거주자의 주민등록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이러한 극빈민층은 실제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일보, 2011.11.08.c).

     

    3) 도시 빈민의 주거 형태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생성된 도시 빈민들은 도시의 하천이나 언덕에 대규모의 판자촌을 이루어 도시 빈민촌을 형성했다. 판자촌, 일명 산동네는 우리나라의 급속한 산업화와 기형적 도시화로 인해 형성된 집단적인 빈민촌이다. 판자촌은 주로 1960~1970년대 서울 등의 대도시로 무작정 상경한 빈민들이 대도시 변두리 산비탈이나 산등성이에 조성한 판잣집들로 이루어진 무허가정착지로 달동네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당시 판자촌은 도시 빈민들과 일부의 시민들에게 굉장히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였다. 판잣집은 1961년 전체 주택의 20%를 차지했고, 1970년 전체 주택의 32%를 차지했었다. 또한, 1980년대 중반 서울시 전체 인구의 13%가 판자촌에 거주했었다. 하지만 그 후 생활 수준 향상과 재개발정책 등을 통해 주거의 형태가 1980년대를 지나면서 블록집, 영구임대아파트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도시 빈민촌은 대다수 판자촌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 건축물들은 무허가정착지로 지정되어 시와 구청의 철거대상 및 이주대상으로 올라가 있다.

     

    4) 한국 근현대사 속 도시 빈민

     

    한국 근현대사에서 도시 빈민들의 문제가 다루어져 왔던 방식은 실로 폭력적이다. 우선 경제개발에 따라 한국 사회가 성장하면서 도로, 주택, 환경, 주민휴식공간 등 도시기반시설이 꾸준히 공급되어 도시에서의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었지만, 이는 도시 빈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실제로 뒤의 답사기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구룡마을에서도 보건소나 파출소, 소방서는커녕 심지어 화장실도 갖추어지지 않아 공동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었다. 이런 도시기반시설의 상대적 부족으로 인해 이들의 빈곤 상황이 더욱 가중되고 상대적 박탈감도 심화되었다. 또한 서구사회에서는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사회복지체제를 정비해서 빈곤층을 보호해왔고, 또 일부 제3세계 국가에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초보적인 사회복지제도가 시행된 바 있지만, 한국에서는 고도성장으로 절대 빈곤층이 빠른 속도로 감소한 까닭에, 사회적 차원의 빈곤 구제가 불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져 공공부문의 사회적 안전망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지 못했다. 따라서 도시 빈민 스스로 생존을 위해 자급자족해야만 했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들여다보면 해방 후 한국전쟁 전 서울에 거주한 시민 중에서 정상적인 주택을 보유한 사람은 전체의 53%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주택정책은 거의 없었다. 공공에 의한 주택의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한국전쟁 후 서울로 몰려드는 피난민들과 농촌인구로 인해 판잣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신규 주택의 보급은 일부 중산층들을 위해서만 존재하였으며 판잣집과 같은 불량주택의 증가로 1954년 서울시는 불량주택, 토막집, 판잣집 등 무허가 건물의 철거방침을 발표했지만, 방침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도시 정비를 위해 불량주택은 철거되었지만, 철거민들에 대한 이주대책은 없었기 때문에 철거민들은 철거 후 다른 지역에서 또다시 판잣집을 짓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촌향도가 시작된 1960년대 도시로 이주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대도시 특히 서울의 주택공급능력으로는 저소득 도시 빈민들이 일반적인 집을 장만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도시 빈민들은 도심의 국공유지 등에 무허가정착지의 판자촌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무허가정착지의 특성상 토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저해하기 때문에 60~70년대 전반에는 정부와 구청에 의한 철거, 재정착, 해체의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철거민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당시 박정희 정권은 묘수를 꺼냈다. 바로 1976년 <도시재개발법>을 제정하여 주민들의 자발적 노력을 통해 판자촌 내 무허가 불량주택을 재개발하도록 하는 주택개량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이 정책을 통해 당시 박정희 정권은 판자촌 지역의 국공유지 불하 등을 내걸고 민심안정정책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즉, 도시 빈민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볼모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초기에는 실제로 그 전후와 비교해 철거횟수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철거민들의 저항 역시 강도나 빈도가 약해졌다. 하지만 판자촌 거주자(도시 빈민)들은 무단으로 점유한 토지를 매입하고 주택을 개량하는데 필요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주택개량사업은 성공적으로 실행되지 않았고 또한 신규 판자촌 형성이 어려워지면서 기존 판자촌이 고밀화되는 현상이 발생하여 결과적으로 상황을 더 악화되게 만들었다.

     

    이러한 판자촌 형성에 대해 세종대 김수현 교수는 판자촌은 정부의 묵인 아래 비제도적으로 운영된 주거복지정책이라고 말한다. 경제개발을 해야 할 정부의 입장에서 판자촌은 저임금 노동자와 블루칼라들을 수용하기 위한 저렴한 주거지로 충분한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급격한 도시화 추세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판자촌을 묵인한 것이다.

     

    3. 결론

     

    도시 빈민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생겨난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학력도 낮고 기술도 없으며 이제는 고령화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의 문제도 있었지만, 사회 구조적으로도 한국 사회의 부족한 시스템상으론 계속해서 도시 빈민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난 수십 년간의 세월 동안 양반집의 서자처럼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에서 철저히 배제됐었다. 하지만 그들도 다 같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지금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주신 분들이다. 따라서 도시 빈민을 위해 적절한 도시기반시설의 확충과 함께 도시 빈민을 위한 사회적인 안전망 제도를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 또한, 도시 빈민촌의 재정비와 거주민의 이주계획을 상호대화 하에 수립하고 거주민들이 자립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이제 악의 고리를 끊어내야 할 시기가 왔다. 아니 끊어야만 한다.

     


     

    4. 답사기

    도시 빈민촌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구룡마을은 강남구에 위치하고 있다. 구룡마을은 대부분 비닐하우스 불법 주거지로 구성되어있지만, 대조적으로 그 주변은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인 대치동과 도곡동이 위치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부조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 현대의 도시 빈민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구룡마을로 향했다. 도곡역에서 구룡마을로 향하는 버스를 타니 버스 아저씨가 잠시 나를 멈춰 세우며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를 여쭤보셨다. 구룡마을로 간다고 하니 젊은 사람이 거긴 왜 가냐며 혀를 끌끌 차신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온통 높은 빌딩과 아파트 숲만 보였다. 이런 부촌에 그런 곳이 있다니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개포중학교에 내려 구룡마을로 쭉 걸어갔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뒤는 강남 중에서도 최고급 아파트가 모여있는 곳 하지만 앞은 입구조차 잘 보이지 않는 구룡마을이 있었다. 마치 바리케이드로 구역을 나눠놓은 마냥 칼같이 나눠져있는 구역은 나로 하여금 오묘한 감정을 가지게 했다. 그렇게 들어간 구룡마을의 입구에는 구룡마을 주거대책위원회가 게시한 여러 개의 현수막이 나를 반겼다. 현수막들을 하나하나 읽고 있다 보니 주민 한 분께서 오시더니만 날도 더운데 생수나 한잔하라고 물을 건내셨다. 마시면서 혹시 구룡마을로 들어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냐고 여쭤보니 이곳 전체가 구룡마을이라고 너가 보는 모든 것이 바로 구룡마을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구룡마을의 심장부로 향했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뒤는 강남 중에서도 최고급 아파트가 모여있는 곳 하지만 앞은 입구조차 잘 보이지 않는 구룡마을이 있었다.
    마치 바리케이드로 구역을 나눠놓은 마냥 칼같이 나눠져있는 구역은 나로 하여금 오묘한 감정을 가지게 했다. 

     

    더운 날이었다. 소매로 땀을 훔치며 앞을 가던 중 첫 번째 집을 발견했다. 나지막한 지붕, 파란 슬레이트 지붕, 먼지 쌓인 우체통. 집을 천천히 둘러보던 중 공가 폐쇄 안내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세월에 빛이 바래 누렇게 떠버린 호소문이 나를 반겼다. 구룡마을 자치회장 이영만씨께서 작성하신 이 대자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투기를 목적으로 건축물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고. 도시개발에 밀려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부득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삶의 터전을 잡고 정착한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투기꾼이 아니라고. 꽤나 충격이었다. 호소문을 읽으면서 정말 짠하면서 가슴 한 편에서 무엇인가 끓어오르는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내 가슴을 울렸던 것은 다음의 한 문장.

     

     

    “서울 강남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꾸는 것이 비록 사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 꿈을 우리 인생을 묻은 구룡마을에서 이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결코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룡마을 주민입니다!”.

     

    짠했다. 아니 사실 짠했다는 표현을 해도 되는 것인가? 옛날에 어떤 한 친구가 내게 그런 얘기를 해준 적 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굉장히 폭력적인 방식이라고, 그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 그냥 그저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너무 하지 않은가. 왜 그 자리에서 30년을 산 주민이 내 집과 터전에 관련된 개발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에게 매 순간 우리는 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호소해야 하는가. 불합리하다. 이런 생각을 두런두런 하면서 길을 계속 걸었다. 곧 본격적인 마을이 나타났고 나는 놀람을 숨길 수 없었다. 실체를 드러낸 구룡마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성인 남자 한 명도 겨우 들어갈 법한 골목길,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든 낮고 좁은 집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거 같은 낡은 지붕들. 개천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판잣집들, 개천 옆으로 위험하게 나와 있는 세탁기들과 빨래터. 정말 충격이었다. 아직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구나. 그것도 서울 시내에서 가장 잘사는 강남구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들에겐 기본적인 사회 기반시설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집들의 대부분 아니 거의 절대 대다수는 무허가집이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도시가스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구룡마을 주민들은 1970년대에서 볼 법한 연탄을 아직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대가 참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도 가스레인지를 쓰지 않는다. 영화에서만 봤었던 가마솥과 아궁이를 아직도 쓰고 계셨다. 그것도 불이 날까 봐 크게 쓰지 않는다고 하셨다. 연탄은 거의 난방용으로만. 취사는 마을회관에서 공동으로 해 드시거나 아니면 작게 가스버너로 해결하신다고 하셨다. 동사무소, 경찰서, 소방서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화장실조차 집마다 갖춰지지 않아 마을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그 구역마다 공동화장실을 이용한다. 공동화장실 각각의 칸에는 파란 마카로 숫자가 적혀있다. 그 숫자에 해당하는 호수만 그 칸을 이용하는 것이다. 벽은 전부 다 가벽이었다. 판자에 황토를 덧대서 지은 집도 있었고 시멘트로 대충 치덕치덕한 곳도 있었다.구룡마을의 집들은 판자와 합판으로 만든 집이라 무너지기 쉬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의지하고 있었다. 바로 앞 멀리 보이는 타워팰리스와 레미안 아파트는 사생활을 중요시하며 세대끼리 따로 멀리 떨어지게 설계하는 것이 트랜드인데 말이다. 지붕들은 비가 샐까봐 파란 슬레이트 지붕 위로 여러 가지를 덧대고 강풍에 날아갈까봐 돌들을 얹어 놓았다. 솔찍히 이런 곳에 전기가 들어온다는게 정말 용했다.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다. 온갖 날벌레와 한 번도 보지 못한 동식물들까지 (심지어 필자는 딱따구리까지 봤는데 딱따구리를 본 것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소리가 정말 크더라) 구룡마을은 분명 열악하고 힘들었다. 사회기반시설은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당장이라도 쓰러져도 무방할 정도로 위험했다. 하지만 구룡마을은 무엇인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공동체라는 의식, 비록 지금 삶이 힘들더라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따뜻함. 그것이 참 좋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느덧 구룡마을의 정상에 도착하게 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내가 보았던 것은 바로 앞의 구룡마을과 멀리 보이는 강남 도곡동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있다니. 어떻게 하면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어떤 노력을 하면 이러한 빈부격차와 도시 빈민의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분들께서 비가 올 때면 집이 무너질까 봐 밤새 선잠을 주무실 때에도 나는 빗소리가 좋다며 창문을 열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셨다.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나.

     

    구룡마을은 무엇인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공동체라는 의식, 비록 지금 삶이 힘들더라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따뜻함.
    그것이 참 좋았다. 

     

    구룡마을을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을 때쯤 어떤 아저씨께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말을 거셨다. 퇴근이 언제냐고 말이다. 처음에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안 돼서 저는 여기 관련해서 조사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제서야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길래 공무원인 줄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더니 대뜸 막걸리 한잔하고 가라고 하셔서 평상에 앉아 아저씨와 막걸리를 한 잔씩 하며 말을 나눴다. 안주는 아저씨께서 부엌에서 들고 오신 천안호두과자 10개. 며칠 전에 자식들이 호두과자를 주고 갔다고 안주로 할 만한 게 이거밖에 없다고 쟁반에 내어 오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아저씨 얘기를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아저씨께서는 원래 대전에서 사셨다고 하셨다. 어렸을 적에 그저 돈을 벌고 싶다는 일념 아래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셔서 닥치는 대로 일하고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에 정착하게 되셔서 이렇게 40년째 살고 계신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아내분께서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시면서 안에 들어가셔서 낡은 사진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그러면서 자기도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어렸을 적에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고 말씀해주셨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 어느새 한 병을 금방 비우게 되었다. 느지막이 슬슬 해가 질 때쯤 아저씨께서 왜 여기를 오게 됐냐고 여쭤보시길래 내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수업을 듣는데 그 수업의 리포트를 쓰러 여기를 오게 되었다고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셨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구룡마을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으시겠냐고. 정부에서 어떤 일이나 정책을 해줬으면 좋겠냐고 여쭤보았다. 아저씨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해도 소용없다.”

     

    그러시더니 이런 말을 해주셨다. “학생 말고도 이때까지 어디 무슨 대학원 학생도 오고 무슨 서울 뭐시기 정치인도 오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여기를 왔다 갔어. 갈 때마다 똑같은 말을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항상 이렇게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라고 입이 닳도록 말을 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아마 학생에게도 말해도 똑같을 거야. 학생이 뭐 미덥지 못하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현실이 그렇다는 거야. 그냥 나는 더이상 희망을 가지고 싶지 않아. 희망은 위험한 거니까.”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씀이 사실일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당장 바꿀 수 있겠는가. 비통했다.

     

    이내 해가 지기 시작하여 내려갈 준비를 하는 내게 아저씨께서 조심히 잘 가라고 배웅해주셨다. 힘드신데 내려오시지 마시라고 한사코 거절하는 내게 아저씨는 그럼 잠시만 있어 보라고 하시면서 아까 먹었던 호두과자 몇 개를 방에서 꺼내오셔서 내 손에 쥐여주셨다. 잘 가라고. 이런 곳에 와서 고맙다고.

     

    그 날 내려가는 내내 가슴이 정말 먹먹했다. 솔직히 울고 싶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너무 분통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러면서도 한편은 정말 죄송했다. 혹여나 부유한 대학생의 가난 체험기처럼 느껴질까 봐 정말 조심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렇게 느끼셨을까봐 정말 죄송스러웠다.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타고 도곡역으로 향하던 도중 창밖을 다시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다른 감정이 들었다. 가슴 속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불합리함이 느껴졌다. 길도 구불구불하고 성인 한 명이 지나다니기도 힘들어서 허리를 숙여서 지나다녀야 하는 구룡마을과 그 앞 쭉쭉 일자로 뻗은 8차선 도로. 그 뒤로 넘어가면 잘 정비된 도로와 온갖 예쁜 가로수와 관상용 식물이 심겨 있는 화단. 입구조차 찾기 힘든 구룡마을과 마치 궁전의 입구인 마냥 으리으리한 구룡마을 앞 레미안 아파트의 정문. 나는 호두과자를 손에 꽉 쥔 채 소리 없이 울었다.

     

    그 날 내려가는 내내 가슴이 정말 먹먹했다. 솔직히 울고 싶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너무 분통했다. 
    나는 호두과자를 손에 꽉 쥔 채 소리 없이 울었다.

     

    * 추가 답사 사진 자료

     

    5. 참고문헌

     

    [1] 이주원, “판자촌에서 뉴타운까지 –도시재개발사업의역사-”, 두꺼비하우징, 2010

    [2] 장세훈, “현대 한국사회에서 도시빈곤의 추이와 특성 (표빠짐)”,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1999

    [3] 조옥라, “도시빈민의 사회 경제적 특징과 지역운동”, 한국인문사회과학회, 1988

    [4] 송준규, “도시 빈민촌 공동체의 형성과 갈등 –강남구 구룡마을의 ‘위험 공동체’와 ‘거주에 대한 권리’에 대한 사례연구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2012

    [5] 강모근, “서울시 계획 시가지 내 무허가정착지 형성 특성”, 서울대학교, 2019

    [6] 박홍근, “1960년대 후반서울 도시근대화의 성격 –도시빈민의 추방과 중산층 도시로의 공간재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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